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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말씀의 실현을 믿는 자에게 박승남 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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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39-56절 개역개정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39-56 역전, 말씀의 실현을 믿는 자에게

 

인생역전! 종종 사람들이 꾸는 꿈입니다.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들은 복권이나 주식이나 코인 등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역전(逆轉)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내가 처한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뒤집어 엎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역전을 꿈꾸는 것은 현재의 삶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힘들고 팍팍하고 어려워서, 행하고 괴롭기에 그 상황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상황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물론 현실을 그냥 운명처럼 묵묵히 받이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운명을 거슬리고자 하는 마음도, 용기도 없기에 그저 모든 상황을 운명에 맡기고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에 저항하도록 촉구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책은 스스로 운명의 한계를 짓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박차고 나서도록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로마의 속국 아래서 불평등, 소외,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역전되기를 바라므로 메시아를 기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가복음 15-38절을 보면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예언이 나옵니다. 두 이야기 사이에는 6개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어머니가 될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일까요? 천사가 전해준 아기 예수님을 임신하여 출산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입니다.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된 것을 천사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인도 하고 축하도 하고 얼마간 함께 지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방문하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살던 유대의 산골의 한 동네는 예루살렘 서쪽 8지점에 있는 아인카렘을 말하는데 이는 마리아가 살던 나사렛에서는 약 150km나 되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길을 39절과 같이 빨리 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사가랴의 집에 도착해서 엘리사벳에게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이 때 엘리사벳은 임신한지 6개월 정도가 되었는데 마리아의 문안은 받은 엘리사벳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자신도 기적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있고 마리아 또한 더욱 더 놀라운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다른 사람은 이해를 못했을지라도 엘리사벳 만큼은 이심전심으로 얼마든지 마리아를 이해할 수 있었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끼리의 대화는 잘 통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과 영적인,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답답합니다. 잘 이해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잘 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엘리사벳만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41절을 보면 마리아가 문안을 하고 난 후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라고 합니다. 사가랴의 복중에 있던 태아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뛰노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복중에서 뛰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뱃속의 아이가 메시아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후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인 엘리사벳도 성령 충만하여 큰 소리로 찬양하며 마리아를 축복 하였습니다(42-44).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여러분 엘리사벳과 마리아 이 두 사람은 가까운 친족이었고, 공통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나이가 많았고, 그 여인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한 시대를 끝낼 사명을 가지고 태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여인은 젊었고, 이 여인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새 시대를 열어갈 사명을 가지고 태어날 것입니다.

또한, 두 여인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성령 충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했고, 마리아와 마리아의 아기를 칭송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칭찬과 축복을 받을 만한 복된 여인입니다. 10대 소녀였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앞에 결단하고 순종하여 자신을 드렸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에게 세례요한의 어머니는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렸고 친척이니 조카벌일 수도 있고 더욱이 자기 남편은 제사장 신분이었고 마리아는 기껏 목수인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라고 한 것입니다. 그야말고 깍듯한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마리아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고전3:16)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깍듯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습니다. 고린도전서 135절을 보면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무례한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아들 세례 요한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겸손히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는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3:14) 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나이로 따지자면 세례요한이 6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또한 친적지간이니 세례요한이 형님이든지 아니면 아저씨 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처럼 나신을 낮춘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요한복음 330절을 보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니 참으로 한 없는 겸손입니다. 실로 그 어머니의 그 아들입니다.

이집트 사막의 교부 마카리우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마카리우스가 숲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낫을 든 사탄이 길목을 지키고 막아섰습니다. 마카리우스를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마카리우스를 죽이거나 넘어뜨리려고 벼르고 벼렸지만 번번이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사탄은 하소연하듯이 말했습니다. 마카리우스! 난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난 네가 하는 거라면 다 한다. 네가 금식을 하면 나도 먹지 않고 네가 밤새워 기도하면 나도 한잠 안 잔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너는 내가 못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있다.” 그러자 마카리우스는 물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사탄이 말했다. 그것은 바로 너의 겸손이 그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네 앞에서 속수무책이란다.”

겸손하면 사탄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겸손의 다른 얼굴은 친절입니다. 친절은 말투로부터 나타납니다. 고운 말, 부드러운 말, 온화한 말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이리 깍뜻하게 인사를 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몸에서 들어 있는 그 아기를 주님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니 그 어머니가 되는 마리아를 높인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성령을 모신 주님의 사람들을 높이기 위해서는 엘리사벳과 세례요한처럼 자신이 낮아져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주님을 그리고 다른 이들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벳의 찬양과 축복을 들은 마리아는 화답하여 찬가를 부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자신에게 임재하신 복에 대해서 감사하고(46-48),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49, 50),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에 대해서 감사하고(51-5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언약을 성취(54, 55)에 대해서 감사의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찬양입니다. 이 찬양은 라틴어로는"Magnificat anima mea Dominum!" 이렇게 시작하기에 이 찬가를 '마그니피카트'라고 부릅니다.

마리아는 깨달았습니다. 1)나님은 약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2)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은 단지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처럼 약하고 비천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처럼 낮고 천한 사람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모든 찬송 시의 극치에 이르는 놀라운 찬양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이와 비슷한 찬양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무엘을 잉태했을 때 부른 노래, '한나의 노래'입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1, 8).

구약의 한나와 신약의 마리아가 만난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을 위로하시며 그들을 통해 큰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인생은 누구나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잘났다고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내치시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 1:27-29)입니다.

 

이 찬양의 절정은 52절과 53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마리아는 유력한 자들을 아래로 내리시고,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을 올리시며, 굶주린 자들을 배부르게 하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노래합니다. 누가는 마리아의 입술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 즉 압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인 메시지와 예수의 사역을 더욱 밀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서 너무나 감격스러운 발견은 운명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자리를 바꾸시는 역전의 은혜입니다. 이 종말론적 역전은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해서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운명의 역적은 계속해서 누가복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620-26절에 나오는 복과 화이야기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1619절에서 13절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이름도 모르는 부자는 죽어 음부에 들어갔고 그렇게 세상에서 멸시 천대와 고통을 당했던 거지 나사로는 죽어 낙원에 들어 갔으니 이 얼마나 큰 역전입니까?

그야말로 성경은 역전, 반전이야기 투성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힌 자는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고통을 겪을지라도 결국 잘 극복하여 마침내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운명의 역전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운명의 역전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 말씀이 제시하고 있는 윤리적 규범은 바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활동했던 예언자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전달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전한 메시지에서 하나님은 말씀의 주체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나타납니다. 신약에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에는 구약에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생애와 교훈,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승천, 재림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복음, 말씀은 매우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1971)라는 학자는 말씀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 대한 기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고대 바빌론과 이집트 문헌에도 보면, ‘말은 곧 신적인 능력으로 인식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말은 능력있고 우주적인 힘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말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으로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헛된 것으로 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효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를 깨닫고 45절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은 아마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은 아닌 듯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은이라는 단어를 문법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꾸준히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확신했다는 의미(분사형)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은 바로 이렇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실로 말씀을 믿음으로 운명을 역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은 '마리아' 그 이름이 오늘날 거룩하게 들리지만 철저한 신분사회인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이 이름만 들어도 즉시 그가 비천한 계급의 여성임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스라엘은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그런 천한 여인의 몸에서 탄생하신다는 것이 성탄의 복음이었습니다.

미국의 한 아카펠라 그룹이 부른 "Mary, Did You Know"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마리아여 아셨나요'라는 제목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ould one day walk on water?" 마리아여 아셨나요? 당신의 아기가 언젠가 물 위를 걸을 거란 걸? Mary, did you know that your baby boy would save our sons and daughters? 마리아여 아셨나요? 당신의 아기가 우리의 자녀들을 구원할 거란 걸?... 아셨나요? 당신의 어린 아기가 맹인에게 광명을 줄 거란 것... 당신의 어린 아기가 그의 손으로 폭풍을 잠재우리란 걸... 당신이 당신의 작은 아기에게 입 맞출 때 당신은 하나님의 얼굴에 입 맞추는 거죠... 마리아여 아셨나요? 당신의 어린 아기가 만유의 주라는 걸? 마리아여 아셨나요?... 당신 품에 잠든 그 아기가 위대한 독생자라는 걸."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범하고 비천한 한 사람을 통해 어떻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담긴 유튜브 동영상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은 2013년에 History channel에서 방영한 10시간짜리 TV 미니시리즈의 한 장면입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1Z-ZfAlrgJs&feature=youtu.be)

 

오늘 말씀은 두 여인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운명을 역전시키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운명을 역전시키는 원리는 투자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될 것을 소망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운명을 역전시키고, 기쁨의 성탄을 준비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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