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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인 자녀 (나실인) 박승남 20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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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사기1:1-14절 개역개정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제공: 대한성서공회

                삿13:1~14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 (나실인)

 

올해도 어린이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교회학교 아동부 미래를 생각하면서 지금 우리 아동센터 정원이 29명인데 아이들이 결원이 되면 곧 새 어린이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만큼 대기 어린이가 계속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어린이가 다른 교회라도 다니고 있고 교회에 아직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일부 있습니다. 저는 아동센터를 세워주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교회학교 두 아이의 어머니인 김지연 집사가 시설장으로 수고하면서 작은 오케스트라 합창단이 세워지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사기 13: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블레셋은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민족이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으며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의 손에 넘겨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요셉은 형들의 손에서 이스마엘 상인의 손 그리고 보디발의 손으로 넘겨지는 엄청난 고통, 불행을 겪었지만, 그런데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지므로 그 인생은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가 됐습니다. 부디 우리 아이들은 귀한 엄마, 선생님들의 손 나아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져서 한국 교회와 이 나라 민족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2절과 같습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여기 나오는 소라는 우리가 아는 바다 생물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초르아(h[;r]x)'호박벌'을 의미합니다. 소라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26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삼손의 고향으로 유명합니다. 삼손의 아버지 이름 마노아(마노아흐)'휴식,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름대로 편안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가정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더욱 고대사회에 아이가 없다는 그야말로 미래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노아의 가정이 절망적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에 하나님께서 찾아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절망적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마노아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노아의 가정에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해줍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선물 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존재, 내가 구입해서 소유하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선물을 내 마음대로 고쳐 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귀한 하나님의 선물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이 주신 그 뜻에 맞게 사용되고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도리입니다

 

기쁨을 넘어서 본질로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물을 주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선물 자체가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임신할 수 없는 여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여인은 너무도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더가 황후가 되었습니다. 황후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살아갈 때 진정한 은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큰 도시의 후생국에 근무하는 한 여직원이 일하게 된 빈민가에서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한 아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를 매우 불쌍히 여겨 아이가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시내의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아이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감동한 의사는 무료로 그 아이를 수술해주었고, 여직원은 수술을 받은 아이에게 열심히 걷는 법을 훈련하고 가르쳤습니다. 똘똘하게 보이는 아이는 점점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중년 부인이 된 후생국 직원과 의사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일을 상기해 낸 의사가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척 똑똑한 아이였는데, 지금쯤 과학자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박사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여인은 우울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사람을 죽인 죄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 저는 그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썼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던 여인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선물을 나에게 주셨는가요? 나에게 큰 사업장을 주셨고, 나에게 큰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때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마노아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선물로 주신 자녀를 낳은 것을 넘어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세상에, 죄악에 취하게 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라

둘째,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머리를 자르지 말라)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의도적으로 의식하도록 하라. 늘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나실인은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나실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나실인 즉 '나지르'분리된 것 갈라놓는다는 뜻으로 세속적으로 쓰지 못하도록 구별해두다. 결국,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나실인은 서원을 해요. 두 번째는 자기를 세상에서 구별해내요. 그다음 세 번째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나실인이 되는데 이 나실인은 여자나 남자나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서원이에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맺게 하려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 앞에 서원 기도를 했지요.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 금하고 등등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서원 기도를 받으시고 한나에게 아들 즉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이게 나실인의 가장 첫 단계인데 어떤 조건부로 하나님께 기도하던 것이 나중에는 조건 없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 위해서 하는 그런 단계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세속적으로 자기를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이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구별되는 조건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 마시지 않고, 자기를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서 자기의 삶은 세상에서 그대로 또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나실인이 하나님께 자기를 봉헌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는 세상의 용도로는 자기를 못 쓰고 오직 하나님의 용도로만 쓰겠다는 것이 이 나실인의 서약입니다.

그러면 레위인과 나실인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레위인은 온전히 하나님 쪽에서 봉사합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이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실인은 백성과 레위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 나실인을 생각하면 누가 생각나요? 삼손 말고요~ 로마서 121절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드린 몸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생활은 직장도 다니고 뭐 농사도 짓고, 공장에서 다니고 다해요. 다 하는데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으로 온전히 하나님께만 자기를 드리고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에서 우리는 예배드리러 학교에 가야 하고, 예배드리러 일터에 가야 하고, 예배드리러 공장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기가 하는 모든 삶이 하나님께 바쳐진 예배라고 보는 것으로 이것이 나실인 정신과 통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요셉을 꼽습니다. 물론 요셉이 나실인의 서원을 했다는 얘기는 없지만. 형들과는 구별된 나실인이라고 이름을 칭합니다. 창세기 392,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말씀하는데 다르게 말하면 요셉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경건하게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요셉은 나실인으로 산 사람으로 나실인의 샘플(본보기)입니다.

사무엘도 나실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머니 한나가 나실인으로 서원을 해서 얻은 아들이므로 사무엘은 나실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나실인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런 주장도 합니다. 나사렛은 나실인들이 사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했을 때, 나사렛, 나지르라고 하는 이름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지르는 나실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나실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지만,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들과 완전히 구분된 그런 삶을 살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나실인은 성결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나실인, 레위인, 제사장으로 연결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지만, 더 나아가서 주님의 거룩이 온 세상으로 확대되어 나가야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그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거룩한 하나님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목회자들이, 우리 성도들이, 우리 부모, 교사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면 나도 모르게 그 거룩이 세상으로, 자녀들에게 전염되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 한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거룩이 세상의 삶에서 확대되어 나가도록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실인의 목적이고. 이것이 거룩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신 이유는 세상에 거룩한 백성을 퍼트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나라, 사랑과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린이들은 지금은 철부지 같지만 이 아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정신이 새겨지고 심어지면 이 아이들은 진정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미리 그려보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경건한 나실인이나 레위인이나 제사장은 이스라엘 전체의 거룩성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개신교가 잊어버린 게 바로 뭐냐면? 이 나실인 정신입니다. 천주교는 수녀, 수사들이 있는데 어떤 분은 이 사람들이 나실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보고 싶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천주교가 유지되는 건 말 없이 봉사하는 수녀들하고 수사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시작한 것이고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더 테레사라는 것입니다.

 

어느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약사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10년 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서원한 분입니다. 그분은 뭐 전도하거나 신앙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약을 조제해 주고 이야기하는데 그분에게서 거룩의 냄새가 풍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굉장한 경건의 힘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분을 만난 이연길 목사님은 40년이 지났는데도 그 약사의 이미지가 본인에게 굉장히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렇다면 이 약사분은 나실인이라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실인 제도는 마치 신선한 샘물을 공급해 내는 샘물 같습니다. 거룩한 샘물이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데 그것이 온 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핫시딤이나 하시디즘이라는 들어 보셨나요? 유대 경건주의 운동인데 이 하시디즘이라고 하는 것은 18세기 초에 우크라이나에서 시작이 됐습니다.

하시디즘은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만이 아니라, 내가 뭘 하든지 사회에 나가서 살 때 하나님과 함께 내가 그 일을 한다면 그것이 경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171절을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이것이 바로 코람데오,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의 눈앞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보시는 것을 의식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욕심을 부리고 이기적으로 살고 원망 불평하고 미워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살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느 랍비가 자기 아들을 하시디안이 경영하는 식당에 보냈어요. 왜냐하면, 이 하시디즘을 배우고 오라고요. 한 일주일 다니고 왔어요. 그래서 뭘 배웠냐? 그러니까 배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뭐 다른 거 특별한 거 하는 게 없더냐? 그러니까 전혀 특별한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렇게 부탁을 했어요. 그러면 가서 물어라. 선생님께 내가 출근하기 전에 1시간 전에 꼭 출근하는데, 1시간 전에 와서 뭘 하느냐고 물어봐라. 아들이 가서 물었어요. 선생님 내가 오기 전에 1시간 전에 오시는데 그때 뭐 하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을 하나님 대접하듯이 대접하기 위해서 그릇을 한 번씩 깨끗하게 닦는다. 아버지한테 오니 뭐라고 하든? 물어보시니까 그릇 한 번 닦는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또 그러면 선생님께 내가 퇴근 후에 또 1시간 후에 머물다가 퇴근하는데 그때 뭐 하냐고 또 물어봐라? 그래서 그리 물어보니까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을 천사 대접하듯이 하나님 대접하듯이 하기 위해서 그릇을 한 번 더 닦는다. 이게 하시디즘이에요.

여러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을 그릇 하나 깨끗하게 닦아서 대접하는 게 하나님 대접하는 것이고, 하나님 대접하듯이 그게 손님들 대접한다는 거예요. 이게 하시디즘의 정신인데 그 밑바닥에는 바로 나실인이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 욕망의 시대에 내가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이렇게 살아가겠다고 하는 어떤 규칙을 정합시다. 하나님 나는 술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나는 절대로 야동을 보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겠습니다. 기타 이런저런 정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몇 가지씩을 정하고 지켜나간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삶을 사는 데 굉장히 유익하고 거기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내 경건의 유익보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워집니다. 또 기도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성결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나하고 가깝다는 느낌이 오시 시작하고 아,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오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마노아가 듣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8) 이것이 오늘날 부모들이 해야 할 기도의 제목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자 마노아는 반복적으로 또 이렇게 묻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는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다 삼가서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처럼 자녀 교육이 어려운 시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생각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양육할 것인지가 최대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자녀 교육의 정답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들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정직하게 살면 아이들이 정직하게 살 것이고, 부모가 거짓을 말하면 자녀들도 거짓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말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으로부터 배웁니다. 교회에서도 아이들에게 인사하라며 머리를 강제로 숙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면 됩니다. 주일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려고 하면 아이들은 본 그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주일은 어른의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하나님 이 원하시는 삶을 따라갈 때 우리의 자녀들도 그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녀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어린이 주일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02357일 어린이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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