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오신 예수님 | 박승남 | 2023-12-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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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1-12절 개역개정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마 2:1~12 왕으로 오신 예수님 오늘 우리 주님은 하늘 보좌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마구간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성탄교회가 있습니다. 옛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성지 순례를 왔다가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다고 하는 동굴을 가보았습니다. 아들 황제에게 청하여 바로 그 동굴 위에다 성당을 짓게 하였습니다. 이 성당은 정말 정성을 다하여 지었기에 오래 걸렸습니다. 324년에 시작하여 15년이 지나 339년에 완공을 보았습니다. 이 성당은 언제인가 불타버렸는데 다행히 성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 일부는 보존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성탄 예배당은 저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1년에 완공한 것입니다. 그후 지붕과 바닥과 내부 장식만 조금 바꾸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스티니아누스가 건축한 이 성당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도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성당은 출입문이 작고 낮아서 한 사람씩 들어가야 하고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이곳을 점령하여 이 성당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다가 유대에 있었던 여러 성당은 다 무너뜨렸는데 이 성당만은 보존키로 하였습니다. 이 성당 안에는 여러 종류의 벽화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그림 벽화였습니다. 아주 좋은 작품이었는데 그 동방박사들이 모두 페르시아 사람의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군인들은 이 성전에 들어와서 자기네 조상이었던 박사들을 볼 때 감격해서 이 성당만은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하였는데, 그들 코란경의 기록에는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이며, 예언자인 예수를 종려나무 아래서 낳았다고 하는데, 이 종려나무는 바로 베들레헴이 있었다는 이슬람 전설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의 황금 사원과 헤브론의 국조 사원과 함께 베들레헴의 저스티니아누스의 성탄 성당도 참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당만은 이슬람교도도 들어오는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께서는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j'yvim;(마쉬아흐) 그리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 Cristov"(크리스토스) 라고 하는 특별한 직분, 직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란 ‘기름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으며 취임, 임직했습니다. 바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예언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임으로 사역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을 보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온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목적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분명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하였다고 합니다. 여기 소동이라는 말은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감정적 동요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정신에 두려움이나 공포로 타격이나 충격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왕 메시아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헤롯왕은 백성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다 모아 놓고서,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캐어묻고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마태복음은 주후 70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만했던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인 로마에 의해서 멸망한 뒤에 쓰인 책입니다. 왜 그때 마태복음이 쓰였을까요? 하나님께서 보이는 나라를 멸망시키셨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보이는 나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망하니까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린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에 의해 멸망하다니 하나님이 안 계시는가 보다. 우리의 믿음의 헛된가 보다. 신앙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나라, 우리가 진정 찾아야 할 나라는 이 땅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그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보이는 나라는 망했지만 보이지 않는 나라는 영원하며 그 나라를 소망하고 추구하고 그 나라의 삶을 누려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무를 갖고 계신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을 펴면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게 족보입니다. 족보를 제시하는 것은 “보아라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다. 왕으로서의 혈통을 갖고 있다”라고 하며 예수님이 왕 된 것을 증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사자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자는 왕 중의 왕으로 튀르키에 말로 아슬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에 예수님을 연상케 하는 사자가 나오는데 그 이름이 바로 아슬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왕이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방의 지식인, 사리를 잘 판단하는 박사, 점성가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태복음은 이처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왕으로 오셨고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왕으로 오신 그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잘난 척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불신하고 교만하게 살아가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굉장히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여러 가지로 약점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는, 다스리는 데 있어서 못하거나 해도 미약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을 여러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까? 내 감정을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까? 그러면 화날 일도 다툴 일도, 얼굴 붉힐 일도 없겠지요. 내 생각과 내 마음과 행동을 다스리기 어려운 그야말로 불완전하고 약점 투성인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주변에는 중독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술, 담배, 도박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그러한 것들을 쉽게 극복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우리의 감정, 성격, 성질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면 부부싸움은 왜 하겠습니까? 사람들 간에 불편한 관계가 왜 생기겠습니까? 불같은 성질이란 표현을 쓸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지식과 이성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쉽게 불의에 유혹되는 것을 볼 수 있고 똑똑한 사람이 이단에 잘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신앙적인 변화, 개종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개인주의 극복하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생각은 있고 마음은 있지만, 우리의 삶은 안 따라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참 불완전한, 모순에 찬 그러기에 사람은 애초부터 나 아닌 다른 외적인 어떤 힘으로 다스림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 아닌 제3의 다스림, 다른 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념이나 신념에 심취해 보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쾌락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 특히 혈육 관계에 의존합니다. 지나치게 부부, 자식에게 의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훌륭한 사상가나 스승 등을 따르기도 하는 등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오늘도 시간에 쫓기며 열심히 살고 있지만, 행복하다 할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왜? 열심히 쫓고 있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힘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는 게 어렵고 힘들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통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오신 진정한 왕, 나를 다스려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겸손하게 받아야 합니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실상은 아기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참으로 잔인한 자입니다. 자기의 왕권을 위해 그리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역대하 21장을 보면 여호람 왕은 가만히 있던 아우들을 모두 죽여 버린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한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십니다. 굳지 세상적인 표현을 쓰면 완전하신, 이상적인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 대통령들은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 해도 뭔가 결점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인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로 임기를 만료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장기 집권을 한 박정희 대통령은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인 사람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요즘 1천 흥행을 하는 서울의 봄의 나오는 전두환 그는 자신의 집권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결국 평생 동지 노태우에 의해 백담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이 두 사람은 김영삼 정권이 탄생하면서 전격적으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IMF 구제 금융사태를 초래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노쇠한 금융관료들의 손을 다시 잡아 카드대란이 일어났고 토건 쪽 원로들의 청을 물리치지 못해 새만금사업 강행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 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통령도 있고 이어서 집권한 두 명의 대통령은 이런저런 비리로 수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실한 인사 검증 및 5대 원칙 공약(위장전입, 논문 표절, 세금 탈루,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자 고위공직자로 등용치 않겠다)을 파기하였고 부동산 대책을 잘못하여 부동산 양극화가 심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취임한 현 대통령은 어떠할까요? 계속해서 30%대의 지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오래 전부터 탄핵이 입에 올려지고 본부장 즉 본인과 부인과 장모의 비리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는데 이제는 사람인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대통령이 과연 퇴임 이후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참 불행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제대로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왕, 세상의 통치자들은 어리석고 잘못하고 눈이 멀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흠과 티가 없으십니다. 잘못하는 일이나 결점이 없으십니다. 또한, 이 세상의 통치자는 누구에게는 맞지만, 누구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고 누구에는 잘 될 수가 있고 누구에게는 잘되지 않을 수가 있지만 예수님은 그 다스리심이 각자에게 다 적절하게 통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아시고 여러분 각각에 맞는 위로와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 낙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다스리셔서 위로해 주시고 어려움에서 이기게 하시고 비뚤고 부정적인 사고를 함으로 사람도 예수님깨서 다스리시면 온유한 사람도 될 수 있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신과 배반과 슬픔과 같은 아픔을 갖고 살아갈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심령을 다스려 주시면 마음의 상처도 치유 받고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몸이 상하고 불완전한 사람에게도 강건함을 주시고 육체적인 연약함을 뛰어넘는 새 삶을 살게 해 주시는 왕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아그립바 왕과 총독 베스도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바울은 자신이 지나온 과거 이야기를 합니다.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적극적이었던 그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에서부터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둘러 비추어 땅에 엎어졌을 때에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사명을 주셔서 결국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총독 베스도가 큰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대답하였습니다. "베스도 총독이여,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임금님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을 당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바울은 율법으로 무장을 하고 그 마음에 교만하고 단단해진 그리고 예수님을 대항하던 그가 사상과 감정과 그 모든 것을 꺾고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왕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셨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왕 되시어 나를 바꾸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들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이야기, 이러한 간증이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바뀐 것이 바로 왕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스리심 때문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메시야 그분이 나와 여러분을 위한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복되고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나의 주님, 곧 나의 왕으로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계획과 내 실력과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에 의하여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 내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방 먼 곳에서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알았는데, 유대에서 성경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은 오히려 몰라 충격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끝까지 찾아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보물들은 모두가 왕에게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을 위시한 예루살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진정 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온전한 다스리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변화되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걱정 근심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함을 받아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탄의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경배하려는 자들은 먼저 자기 마음을 가난한 곳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길은 주님을 왕으로 높이는 길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높이는 것은 우리가 왕의 신하들처럼 사는 길입니다. 말만 하는 자들은 왕의 신하가 될 수 없습니다. 왕을 높이려면 기독교의 진리를 말로 설명하지 말고, 행동이나 헌신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미는 언어로 말하지 않고 그윽한 향기로 말한다. 향기야 말로 장미의 언어이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늘 행동으로, 그 향기로 말했듯이 우리도 이제부터는 행동으로 말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경배입니다. 이 땅에 오신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이젠 말이 아닌 우리의 삶으로 예수님을 영원한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 왕 되신 주님이 주시는 성탄의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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