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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 박승남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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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9:27-36절 개역개정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9:27~36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

 

설 명절 잘 보내고 계시나요? 코로나 때는 영상과 문자로 세배하고 안부를 전하였는데 이제는 서로 오가고 함께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고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왕은 있지만 백성이 하나도 없었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가버려 하나님의 나라는 텅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 사는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하나님이 이 땅에 살게 하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 나라에 사람을 초청하셨으니, 가 바로 갈대아 우르 그리고 하란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만드시고는 사람들을 계속 불러 들어오게 하십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늦게 부름을 받고 와서 일한 사람이라도 동일하게 품삯을 받게 하시는 나라임을 일러주십니다. 일찍부터 와서 일을 한 이들은 원망, 불평했지만 만일 늦게 온 이들이 자기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도리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와서 일을 했다고 자세를 부리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오후 늦게야 높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갔을 때는 아마도 저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힘들게 산으로 올라가셨나요?

28절을 보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핍박도 없고 평온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변화산 사건 이후부터는 많은 역경과 고난에 직면하시게 됩니다. 이제 하산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수난을 당하고 젊은 나이에 그 모진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훈련을 시키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느 때에 마찬가지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유혹 앞에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상태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앞에 둔 주님께서 어찌 피곤을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 제자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16:2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런데 여기 왕권이라는 말이 바로 basileiva(바실레이아) ‘왕국이라는 말입니다. 왕권, 왕의 통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 할 때 나라 역시 바실레이아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인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신 이유는 세 제자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가 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29절을 보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광채가 났다 ejxastravptw(엑사스트랍토)는 말은 번쩍이다, 빛나다 라는 뜻으로 번개의 섬광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얼굴과 옷이 얼마나 빛났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의 몸 전체가 천상적인 광채로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중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가 어느 때였을까요? 32절을 보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라고 합니다. 여기 깊이 졸다가는 깊이 잠을 잤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밤이었던 것입니다. 산에 오르느라 피곤하였고 때가 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저들은 기도는 하지 않고 잠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주변에 변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2123절을 보면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전깃불이 필요 없습니다. 태양도 필요 없습니다. 주님의 광채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이 환하게 빛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무섭게 하고 두렵게 하는 밤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우리가 밤에 누리는 휴식, 안식을 훨씬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면만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속마음도 환하게 빛납니다. 항상 맑고 밝습니다. 어둠과 그늘이 없습니다. 슬픔과 수색이 없습니다. 고민과 걱정과 불안과 근심이 없습니다. 질병과 고통과 문제가 없이 다만 늘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뿐입니다. 늘 감사하고 고마운 것뿐입니다. 바로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옛날,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모습은 주님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고백한 것이 무엇인가를 눈으로 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초라하고 가난하고 먹지 못하고 항상 고난을 받고 참으시고 죽으시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며 우리가 올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모습을 보고 소망 중에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게 된 저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계에 대해서, 육의 세계에 사는 우리, 시간과 공간에 사는 우리, 물질의 세계에 사는 우리로서는, 이성과 상식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영계에 대해서는 상식과 지식과 경험이 없으므로 베드로가 굉장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뭔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그래서 하나에는 주님이 사시고, 다른 두 천만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살도록 모시겠습니다.”

자기들은 어디에 머물려고 하는지는 상관없이 오직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34절을 보면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구름도 하나님이 영광을 표현한 말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그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성경뿐 아니라 종교학에서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신의 영광을 보면 큰 두려움에 휩싸인다고 합니다(누미노제 Numinose 루돌프 오토(Rudolf Otto). 그래서 일찍이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 죽게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5)

베드로도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보고는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 같이(1:17)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나라의 실체를 온전히 목격한다면 큰 두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여전히 죄의 몸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는 우리는 거룩한 부활의 몸, 영광의 몸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두려움으로 주님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매우 친근하게 주님을 뵈옵고 주님의 영광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곳, 모든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는 나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간의 시대 차이는 그 얼마입니까? 모세는 적게 잡아도 예수님 보다 약 1,500년 전의 사람이라고 하면 엘리야는 약 85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시간 차이가 얼마나 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친근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을 때도 온 교인들이 마음이 하나 되어서 그 마음으로 서로 섬기며, 물건을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이 서로 나누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우리는 한눈에 서로서로 알아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겠지만, 그 얼굴은 전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단숨에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은 물론 아브라함도 모세도 베드로도 바울도 알아볼 것이고 그분들도 우리를 한눈에 알아볼 것이고 막힘이 없이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 간의 아름다운 친교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간의 대화 주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31절을 보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나눈 대화 주제는 예수님의 별세,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별세란 말을 원어로 보면 ‘exodus’입니다.

엑소더스는 탈출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특수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동시에 특정 장소를 떠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증시에서 투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경우에도 엑소더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원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내용이 담긴 성서의 출애굽기(탈출기)’를 의미합니다. 본래 히브리인들은 그 이름들은 이러하니라는 뜻의 웨엘레 쉐오트를 제목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을 주전 300년경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출애굽기의 명칭이 엑소더스로 바뀌었고, 각종 영어 성경도 대부분 이를 차용하여 엑소더스라고 표기했습니다. ‘출애굽기라는 명칭 역시 엑소더스를 의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별세하실 것을 ‘exodus’ 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별세(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는 우리를 구원과 해방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출애굽, 즉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는 구원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별세와 함께, 세상 죄와 고통 속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인생들을 이끄시고 하나님 나라로의 엑소더스, 대 탈출이 이 세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신 것은 구약 여러 곳에 기록된 메시아에 관한 말씀, 고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한 엑소더스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나라입니다. 마서 14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동번역은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 희생, 죽음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나라의 백성,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천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대화가 잘 통하는 나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모세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대탈출을 하게 하여 구원, 해방을 이루게 한 지도자입니다. 엘리야도 아합과 이세벨의 꾐에 빠져 우상숭배,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했던 지도자입니다.

그러니 비록 몇천 년의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해도 너무도 대화가 잘 통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탈출은 너무도 고대하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 일은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통해 죽으심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주님의 고통이나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모세는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11:15), 그리고 엘리야는 주여,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4)”라고 기도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픔과 고통을 당했으면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요? 그리기에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대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대화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대화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대화란 상호신뢰, 상호존중을 밑바탕으로 상대방과 오가는 말이 있고 서로의 반응이 있는 상호작용입니다. 대화는 일방통행이나 혼자 신나서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직위가 낮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각이 낮은 아닙니다. 내가 옳은 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점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또 다른 배움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대화의 기본정신입니다. 다른 사람 말을 들으려는 태도와 타인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이 되어 있어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의 말을 가슴으로 읽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뤄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에서는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바로 작은 천국입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소통이 잘 이뤄지고 진정한 대화가 이뤄지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각자 여러 모양은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 백성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도 잘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통한다면 이는 무엇이 문제일까요?

여러분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는 고난을 당한다 대화요, 내가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린다는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뜻에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을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고 감사를 드렸겠다고 생각됩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다 그러한 정신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변화산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모습이 바로 드러나야 하고, 주님의 광채로 빛나야 하고, 천국의 교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렵고 가난한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나눌까? 죽어 가는 영혼들을 어떻게 하면 구원에 이르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어려운 교회를 돕고 선교를 위해 힘쓸까, 하며 의논하는 영혼의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곳이 작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교회,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와보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주님의 길입니다. 

세상의 길 (자신들을 위한 사람들의 길)

주님의 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길)

자기중심적(이기적)

타인 중심적(이타적)

자신의 삶을 구함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잃음

세상을 얻음

소유를 포기함

큰 자가 됨

작은 자가 됨

다른 사람 위에 군림

모든 이의 종이 됨

걱정

믿음

두려움

용기

남에게 해를 끼침

남을 구함

자신을 섬김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길을 걸어야 할까요? 마태복음 7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여기 좁은 문 좁은 길이 바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길,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입니다.

 

35, 36절을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디를 바라보며, 어디를 향해 걷고 있습니까? 우리는 35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 214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온갖 번잡한 소음을 가라앉히고 그 안에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사순절,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사순절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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