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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환자의 믿음과 예수님의 크신 사랑 박승남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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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그 따스한 사랑, 그 크신 사랑을 너무도 잘 볼 수 있는 말씀이 바로 본문 40절 이하에 나오는 나병환자 이야기는 전도의 한 예입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했습니. 그러면 이 나병 환자가 언제 왔을까요? 물론 본문만 보면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를 때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나병환자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지요? 만약 그렇게 하다간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도 나왔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40절을 다시 보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입술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행동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도 잘 몰랐는데 이 사람은 제대로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이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뭐라고 말하나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 고쳐주십시오.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은 낫고 싶다는 말도 치료해달라는 말도 없습니다. 다만 원하시면 입니다. 미적지근한 간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또한 그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원하시면 이라는 말에는 예수님께서는 자기 같은 나병환자도 고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자 그러면 뭐가 문제인가요? 당신은 나를 고칠 수 있지만 나를 고치기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나병은 하나님의 천벌을 받아 생긴 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나 천벌 받은 사람이야, 하나님이 나를 저주했기에 이 병에 걸린 것이야. 그런데 나를 벌하신 분이 과연 나를 고쳐주실까?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주님이 원하신다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이는 너무 귀하고 간절한 그리고 겸손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느냐 그게 믿음입니다. 나병 환자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각오하면서 돌에 맞으면서 주님께 나올 수 있었고 엎드려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나병환자를 보신 우리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41절과 같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 먼저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가서 덥석 손을 대신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슴이 얼마나 북받쳤으면, 얼마나 기쁘고 감격하셨으면 손을 덥석 대셨을까요? 그러니까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그 신뢰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감동받으셨는지 손을 대신 것입니다. 사실 나병 환자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될뿐더러 사람들이 나병 환자를 만지면 안 됩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져주셨습니다. 율법보다 영혼이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아니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감격하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덥석 손을 대시고 고쳐주셨을까요? 41절을 보십시오. 뭐라고 기록되어 있나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splagcnivzomai(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픈 감정, 가식이 아닌 폐부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연민과 뜨거운 마음을 말합니다. 신약시대 당시 이 단어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열이 나고 병든 자신의 아이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저 고통이 내 고통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라는 마음의 표현을 할 때 쓰였습니다.

 

이어서 43~44절을 보십시오.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여러분 이사야 422절을 보면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떠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영혼을 사랑했기에 그리하신 일이지 무슨 자기 자랑을 위해, 인기를 위해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45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말을 안 듣습니다. 보십시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래서 다시는 드러나게 그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침 받은 나병환자가 이 일을 많이 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 많이라는 말은 자주’, ‘크게’ ‘멀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여러 번 전파했다는 뜻도 있지만 여러 가지로 전파하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고침을 받은 것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지가가 경험한 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 긍휼, 그 따스한 손길을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보다 더 높은 차원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보다 아는 것이 위대합니다. 물론 여기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 안에 들어가 봐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살아봐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는 주님을 신뢰함으로 그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이 경험한 일,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을 전한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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