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첫 번째 | 박승남 | 2019-07-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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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7월 첫 번째 셀 가족모임 I. 말씀 속으로 1)찬송 혹은 복음 성가를 몇 장 부름 2)제목 [주님이 먹이시는 공동체] 막6:30~44절을 교독하여 읽어 봅시다. 1. 그림으로 보기 1.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께 몰려왔다고 생각하십니까?(요6:26절 참고) 몰려오는 이들을 예수님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셨습니까?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제자들의 전도의 결과도 사람들이 모여든 것에 한 몫을 담당한다.(7-13) 사람들이 기대하던 세례요한이 아무런 힘없이 죽으면서 사람들의 기대가 예수님께로 집중 되었다.(14-29) 이때 몰려든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예수님은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신 것이다. 2. 예수님이 얼마 동안이나 백성들을 가르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굶주린 백성을 놓고서... 꽤 오랫동안 가르치셨다. 31절에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 이라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신 것은 저물 때이다. (때가 저물어가매(35)) 그 사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럼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 늦은 아침쯤이라면 적어도 6-7시간을 가르치셨다는 이야기이다. 배고픈 사람들을 데리고 이렇게 오래 가르치셨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3. 오천 명이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먹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남자만 오천명 아이와 여자들까지 하면 거의 오천명의 거의 두배나 세배가 되는 숫자이다. 이들이 50명씩 혹은 100명씩 떼를 지어서 둘러앉았다. 분위기는 평안했을 것이다. 푸른 잔디위에 앉아서 예수님이 주시는 음식을 받아 먹는 사람들의 모습... 목자 없이 방향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참 목자를 만나서 평안을 얻는 모습이다. 4. 여러분 주님은 기도하시고 앉은 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먹었고 먹고 남은 것을 다 거두었을 때 열두 바구니가 가득 찼다. 5. 떡과 물고기를 드린 사람은 누구입니까?(요6:9) 이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떡과 물고기를 드린 사람은 한 아이(paidavrion(파이다리온) 어린 소년, 아이, 청년)였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6:9) 이 아이는 자신의 도시락으로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을까? 이 아이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다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사온 도시락을 자기가 먹는 것보다는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는가? 그런데도 자기 도시락을 자기가 먹지 않고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은 이 아이가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고 예수님을 좋아하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자기 도시락을 줘도 자기는 하나도 배가 안고프고 오히려 배가 부른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2. 말씀을 새겨보기 1.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광야의 첫 번째 시험에서 하신 주님의 답변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지 나누어 봅시다. 여기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은 단지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보여 보라든가, 아니면 예수님이 배고프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메시야로서 줄 수 있는 것은 떡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떡을 주는 메시야가 되라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지금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떡을 주는 메시야가 아니라 말씀을 주는 메시야가 되시겠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도 굶주린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떡을 던져 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이셨다. 그리고 육신의 필요도 채워주신다. 말씀이 먼저 이다. 2. 백성들을 먹인 기적은,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내용을 처음부터 자세히 읽어보고 여러분의 견해를 이야기 해봅시다. 34절에 예수님이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면서부터이다. 배고프고 헐벗은 그들, 목자없이 방황하는 그들을 보면서 연민을 정을 느끼기 시작하시면서부터이다. 3. “불쌍히 여기사”(34절)란 단어는 예수님에게 대단히 중요하게 사용되는 단어인데, 그 말이 무엇과 연관되는지 찾아봅시다. (마9:36, 눅10:33) 불쌍히 여기사는 splagcnivzomai(스플랑크니조마이)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는 것으로 가장 강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용된 ‘스플랑크니조마이’(눅10:33)는 위태로운 순간에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재물과 시간과 힘과 생명을 조금도 꺼리지 않고 쓰는 태도를표현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시고 병자들과 약한 것들을 고치셨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반드시 행동과 연관이 된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바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이유도 이 마음 때문이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먹이시는 것도,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도 이 마음 때문이다. 4. 34절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큰 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39절을 보면 이들을 떼로 지어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리와 떼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아 봅시다. 무리는 o[clo"(오클로스)로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밀어붙이는 `많은 사람들', 몰려 다니는 `떼(mob)'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잘 것 없는 집단인 `대중'를 말한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을 떼를 지어 앉게 하신 것을 영남식학대학 오규훈 총장은 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0명 100명이면 서로의 삶을 나누고 서로가 이야기를 하고 들을 수 있는 숫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떼를 지어 앉게 하심으로 질서를 세우셨고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오손도순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이 떼라는 말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3가지 단어로 사용되었다. 1)마가복음 6장 39절- ‘쉼포시온’ - ‘함께 음료수를 마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잔치를 할 때 식탁에 앉는 것을 가리킨다. 비록 광야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만찬을 하신다는 그런 감정이 었음을 나타낸다. 2)마가복음 6장 40절- ‘프라시아’- ‘정원의 화단’ 을 의미하는 단어다. 제자들이 볼 때 마치 화단에 꽃들이 정렬된 것 처 럼 빨강, 노랑, 파랑 색깔들로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3)누가복음 9장 14절 - ‘클리시아’- 기댄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그곳은 정원화단이나 연회장이나 만찬장도 아니다. 더구나 거기서 무슨 만찬을 하듯이 서로 기대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옷은 거의 다 비슷한 옷이라 오늘처럼 알록달록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에는 그 무리들을 향한 복음서 기자들의 시선이 그리고 나아가 주님의 마음을 담겼을 것이다. 주님은 주님은 오합지졸인 무리들을 귀하게 여기시어 정원 화단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시고 서로 만찬자리처럼 서로 기대어 먹을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하실 정도로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이다. 비록 주님의 떡을 받는 무리들이 힘이 없고 작고 연약한 자리도 말이다. 그리고 서로 서로 소중히 여기도록 하셨다. 서로 얼굴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서로 즐거운 시간을 지내도록 하신 것이다. 여러분 교회는 주님 주시는 생명의 떡과 음료를 먹고 마시는 연회장의 사람들니다. 샤론의 꽃 되시는 주님의 정원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꽃들이다. 서로 성격이 다르고 학력과 가진 것과 사회적인 지위가 다르다 해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여지는 정원의 꽃과 같은 존재들이다. 주님 보시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그렇게 보고 있는가? 우리 모두 다 단점, 허물, 약점들이 있지만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좋은 점들, 칭찬하고 싶어하시는 것들, 기뻐하시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더 크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성도들의 정원으로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만찬장의 귀한 사람들로 서로 기대고 대화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다. 결국 주님의 교회는 기쁜 곳, 즐거운 곳, 웃음이 넘치는 공동체, 사랑과 희망과 평화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공동체, 주님 주시는 풍성한 양식을 먹고 배부르며 만족해 하는 공동체이며 서로 기대 수 있고 서로 의지하고 기쁨과 슬픔, 어려움을 함께 하는 공동체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버팀목 사명’을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살전 5:14절을 보면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인정이 메마른 거친 세상 속에서 우리 교회가 꼭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살이에 지쳐 홀로 설 수 없어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 저들을 일으켜 세워주어야 한다. 5. 이 기적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어떤 것인지를 말해 봅시다.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시대 사람들은 목자 없이 방황하고 있었고,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다.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참 목자가 되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신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영의 양식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 ‘church’ 란 용어의 유래 알아보기] church 라는 말이 고대 스코틀랜드어 ‘kirk’ 에서 비롯 되었다. 그 의미는 ‘circle’ 즉 ‘동그라미’ ‘원 圓’ 이다. 그 이유는 교회란 결코 모가 나지 않으신 예수님을 닮아 circle 동그라미 ‘원’ 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교회. 세상을 향해 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교회. 그래서 누구나 서로 연결되고,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 쓰러지지 않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교회. “동그라미 교회” “Circle Church” 이제 25년을 넘어 30년 50년을 내다보며 우리 교회가 이러한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원을 품어본다.
3. 삶에 옮겨내기 1. 1994년 6월 30일 점촌시민교회에 의해 개척예배로 시작된 남부시민교회 그리고 현재 교회당으로 이사하면서 쓰게 된 아름다운교회가 25년의 역사를 맞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각자의 느낌과 교회를 설립하시고 이제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말을 해 봅시다. 2.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떠한 교회이며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을지 말해 봅시다. 3. 주님은 어떤 일을 사실 때든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당신의 하고 있는,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Ⅱ. 돌봄과 기도 (Work & Prayer) 아래의 제목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1)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교회와 자신의 역할을 위해서 2) 목회자들과 선교사님들과 후원하는 자립대상교회와 목회자들이 지치지 않고 사명 잘 감당하도록 3) 나라와 민족 그리고 대통령과 정부와 지도자들과 여러 정상회담을 위해 4) 셀 모임과 리더와 기도가 필요한 연약한 이들과 셀 가족 식구들 및 각자 기도제목을 들어보고 위해
Ⅲ. 증거 (Witness)
●오는 주일: 1)맥추감사주일입니다. 2)성찬식: 낮 예배 시간에 가집니다. ●식사 및 청소 담당: 리폼드(1)셀 * 찬송 198, 208장을 부르고 헌금을 드리고 셀 리더가 헌금기도를 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치고 교제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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